▲ 석호영 세무사

땅거미가 드리워지기 시작 하는 저녁, 테헤란로는 집을 향해, 또는 이어지는 비지니스를 위한 술 좌석을 향해, 혹은 친구나 연인과의 만남을 위해 퇴근하는 차량 행렬로 가히 주차장이다.

마치 서울 한 복판에서 007 특공 작전이나 하듯, 첩자나 레지스탕스들이 서로 은밀히 만나 듯 저녁 약속한 그들과 나는 접선 한다. 부랴 부랴 당도한 곳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은 안가보다 깊숙한 곳, 레스토랑이었다.

산해진미가 차려 지고 한가지 한가지 품평을 하며 생명줄을 통해 배속으로 미끄러지듯 낙하 시킨다. 한정식이라서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이 진상 되었고 그 중 일미는 쑥국이었다. 고기와 생선이 즐비 하나 쑥국이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제철 음식이라서 일 것이다.

사람도 수없이 만나고 헤어 지지만 마음과 가슴으로 만나지 않고 얄팍한 처세와 이해관계로 대충 대충 만나다 보면 아무리 오랜 시간 만나도 인간적이며 깊은 사람 냄새를 맡기가 어렵다.

영화,'러브 어페어, Love afair,'에서 워렌 비티는 아넷 베닝에게 말한다. "I like watching you move, 나는 당신의 움직임을 좋아 한다. 아마도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 무슨 행동을 하든 좋아 보이고 사랑스럽게 느끼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다"는 의미로 와닿는 말이었다.

'사랑스럽게 느끼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볼 수 있다는 것' 오늘은 그런 사람들, 친구들 이어서 좋다. 우려낼 대로 우려낸 곰국맛처럼, 은은한 꽃향기처럼, 그윽한 맛이 있는 친구들이어서 좋다. 굳이 '좋은 친구 만나기에도 찰라의 인생 여정'일진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만날 필요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하는 날이다.

인간 냄새가 물씬 나고 케미와 파장이 맞으니 그가 나에게 아무 행동이나 아무 말이나 해도 좋다. 아니라고 해도, 거부해도, 냉랭해도 좋다. 그래야 진정한 친구일 것 같다. 진부한 말이기는 하나 단점과 아픔까지도 수용하고 함께 나눌 수 있어야 친구 자격이 있을 것 같다.

한강 물의 본심은 강상(江上)에 떠도는 낙엽이나 쓰레기가 아니라 도도히 흐르는 강심(江深)이 진정한 한강의 강심(江心)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들도 그렇다. 아무 말이나 아무런 행동을 할 소인이 아니라서 좋다.

기품과 품격은 늘 옆에 좌정해 있다. 그들이 살아 온 인생 여정이 그렇게 만만하거나 호락호락한 것만은 아녔기 때문일 것이다. 언행에 깊고 넓은 서사가 숨어 있다. 본심을 알면 겉으로 드러난 사소한 행동이나 언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 된다. 강심(江深)이 도도한데 그 강상(江上)에 지푸라기 몇개 떠돈다고 무슨 상관이 있으랴.

맛있는 식사와 맛갈스런 대화를 곁들이니 저녁 식사는 식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감 넘치는 소퉁과 만찬이 되었다. 행복하고 맛있는 식사였다. 우리 일행들은 식후, 오랜만에 스카이웨이로 드라이브하며 바람이나 쐬자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어느 누가 그리 하자 하니 모두 그대로 오케이다. 마치 '먼저 말한 사람 의 말이 법'이라도 된 듯 줄줄이 동의했다. 육십이 넘어간 친구들의 만남이니 어느 한 사람이 제안을 하면 크게 이의없이 넘어 간다. 이순(耳純)의 연세에 당도한 친구들이라서 역시 다르다.

광화문과 세검정을 지나 부암동을 경유, 스카이웨이 길목에 들어섰다. '산모퉁이 카페'에 들려 차한잔 땡기는 순간도 패스하고 그냥 스카이웨이로 진입했다. 밤 시간에는 웬지 귀소본능이 작용해 주어진 시간이 짧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올라가는 길, 그 길에 자전거를 타고 힘차게 오르는 사람들이 간간히 시야에 들어온다. 자동차를 타며 본의 아니게 그들에게 서치라이트를 쏘는 것이 좀 미안하다. 두툼한 대퇴부 근육이 빛에 반사 된다, 정말 건강미가 넘쳐 난다. 그들이 멋져 보였다.

수노근선노 인노퇴선쇠(水老 根先老 人老 腿先衰)라고 하지 않던가. 나무는 뿌리가 먼저 늙고 인간은 대퇴부가 먼저 쇠하니 대퇴부 근육 강화에 힘쓰라는 말인 것 같다. 그들이 자동차로 오르는 우리 일행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하다. 그런 생각이 스치니 그들이 더욱 멋져 보인다. 장수 시대이니 건강이 보배라는 생각도 다시금 든다.

꼬불꼬불 몇굽이를 지나니 정상 팔각정 주차장, 벌써 먼저 도착한 자동차 드라이브 객들로 입구가 빼곡하다. 낭만 거객들이다. 저녁 식사후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단촐하게 기분 전환 하기에는 북악 스카이웨이 드라이브가 제격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복잡해서 팔각정은 패스, 오던 길로 계속 질주했다.

일행들은 뱀처럼 꾸불꾸불한 한 도로를 달리는 맛이 스릴있고 좋다고 탄성이다, 마치 철들지 않은 어린아이 같이 좋아 한다. 젊은 한때 이 곳에서 한두번 드라이브 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데 있으랴. 추억의 도로이며 연인들에게는 로맨스의 도로, 북악 스카이웨이가 아니던가.

꼬불꼬불한 길이기에 숲속 사이를 통해 비치는 차량들의 라이트 빛도 눈부시고 먼 아래 서울 시내의 야경도 현란 하다. 그리고 남산, 족두리봉, 비봉, 향로봉, 형제봉, 승가봉, 사모바위 등.

서울 주변의 온갖 산들을 시야에 담을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녁이라서 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밤은 이렇게 거대함도 삼키며 동분서주, 아등바등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하루 종일 지웠던 짐을 내려놓으라 한다. 그들은 살포시 어둠과 함께 피로를 녹이며 둥지를 튼다.

당도한 곳, 북악 스카이 골프 연습장, 공직 근무 시절 점심 식사겸 골프 실력 연마를 위해 간간히 왔던 곳이다. 이 곳에서 업무 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공에 실려 날리면서 골프 실력이 많이 숙련 되었다. 잠깐 멈춰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주차장은 주차 공간이 없을 정도로 골프 애호가들의 차로 꽉 차있었다. 그래도 차 한대 더 주차할 공간은 있었다. 주차를 하고 내리니 바로 옆에 아담한 다리가 있고 요요히 달빛이 다리 위를 흐른다.

다리와 연이어 이어지는 길, 달빛을 받은 흙길, 누드스럽게 쭉 뻗은 오솔길이 맨살을 드러낸다. 걷고 싶은 충동이 또한 일었다. 고만 고만한 잡목 사이에 조성된 아담한 오솔 길이었다.

봄꽃 향과 소나무 향이 은은하게 달빛 속에 흩어져 필자의 시선과 후각을 교란한다. 흙도 밟고 계단도 오르면서 로맨틱하게 산책할 수 있는 정이 가는 달밤 길이었다. 얼마를 오르니 계단 옆에 샛길이 시선에 들어온다. 유년 시절 학교 정문 보다는 울타리 샛길을 이용하던 본성이 발동했다.

오솔길 속 샛길인데도 군자는 대로행이라 했거늘, 대도무문(大道無門)의 법과 도덕을 마치 허무는 것처럼 묘한 기분이 든다. 허무는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달빛이 고요하고 고즈넉하다. 소나무 숲과 잡목들이 달빛에 실루엣 커튼을 친 것 같다. 달빛 조명과 함께 몇 스텝 춤이라도 출만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연인이 옆에 있으면 뽀뽀라도 해줘야 될 듯한 야릇한 느낌이 충만된 분위기였다. 아니 우리 연세엔 키스라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그러지 못해 아쉽다. 그래서 친구끼리는 이렇게 무드있는 곳에 오지 않는가 보다. 폭발하는 감성을 억제하며 섹시하고 쓸쓸해 보이는 달빛에만 살짝 키스 해줬다.

아니 저 달과 키스라도 하려면 몇 만년 후에나 가능 하리라. 달은 용광로 속에서 정열적으로 불타는 사랑이 아닐 것 같기 때문이다. 또 야성이 팔팔한 늑대와 같은 야수적 사랑도 하지 않을 듯 하다. 이루어질 듯 안이뤄질 듯, 꺼질 듯 살아날 듯한 화롯불처럼 멜로적 사랑을 구가할 듯 해서이다.

또한, 달이 하는 사랑은 번갯불에 콩복아 먹는 식의 사랑도 아닐 것이고 속전속결의 사랑도 아닐 것이다. 은근하고 고전적인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잎과 꽃이 못 만나는 상사화가 그렇듯, 정열의 태양과 은은한 달은 만나지 못하는가 보다. 엉뚱하고 생뚱맏고 뚱딴지 같은 생각도 해보는 밤이다.

유난히 높게 자란 소나무 사이로 새어 오는 달빛이 요요하고 휘황했다. 서울 한 복판에서도 불과 조금의 시간만 움직여도 만날 수 있는 멋진 광경이었다. 달을 보노라니 윤선도의 '오우가'가 불현 듯 뇌리를 스친다.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고야.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달(月),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니 밤중에 밝은 것이 너 만한 것 또 있겠는가 보고도 말이 없으니 내 벗인가 하노라.

송(松), 더우면 꽃피고 추우면 입지거늘 소나무 너는 어이 눈과 서리를 모르느냐 땅속 깊이 뿌리가 곧은 줄을 그것으로 아노라.

석(石),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쥐고 풀은 어찌하여 푸르듯 누르나니 아마도 변치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수(水), 구름 빛이 좋다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 맑다하나 그칠 때가 많은지라 좋고도 그칠 때가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죽(竹),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러고 사철을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송죽과 수석에 달과 친구들과 필자가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또 무엇이 있으랴. 윤선도의 오우에 친구 셋을 더하니 북악 팔우면 족하지 아니한가. 친구에게 무슨 서열이 있으랴 그러니 오우의 시순(詩順)이 좀 틀리면 어떠랴.

영화 인도차이나,

여 주인공 옐리안느(배우, 까뜨리나 드네브 )는 아름다운 레만호수를 바라보며 호기있게 말한다.

"나는 많은 남성과 흔적 없는 사랑을 해봤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남자와 여자, 산과 들, 인도차이나와 나, I've had a lot of traceless love with men, and there are things I can't keep apart from, men and women, mountains and fields, and Indochina and me"라고,

과연 필자와 떼어 놓을수 없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친구, 로마 떼어 놓을 수 없는 그중의 하나일 듯하다, 그들도 나처럼 생각했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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