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흥사단 독도수호본부, 대한제국칙령 반포 120주년 기념 독도 세미나 개최

“임란 후 300명의 승군 유지된 흥국사승 뇌헌으로 조선조정의 지원 유추 가능”
 

▲ 24일 흥사단 독도수호본부는 혜화역 본부 강당에서 ‘대한제국칙령 제41호 반포 제120주년 기념 독도 세미나’를 개최했다.
▲ 정태상 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가 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 ‘대한제국칙령 제41호 반포 제120주년 기념 독도 세미나’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한 안용복사건은 안용복의 주도하에 모두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여수 흥국사승 뇌헌의 역할이 그에 못지않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24일 흥사단 독도수호본부는 혜화역 본부 강당에서 개최된 ‘대한제국칙령 제41호 반포 제120주년 기념 독도 세미나’를 개최한 가운데 전 인하대학교 연구교수 정태상 박사는 ‘안용복 2차도일시 순천승 뇌헌의 역할’이라는 발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정 박사에 따르면 1696년 안용복의 2차 도일(渡日) 시 일행 11명은 울릉도와 독도를 거쳐 일본 오키섬(隱岐島)과 돗토리번(鳥取藩)에서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당시 일행 11명 중 뇌헌(雷憲)을 포함한 ‘순천승’ 5명의 소속은 여수의 흥국사(興國寺)였다.

여수 흥국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의승수군 본부가 위치해 있었고, 이후에도 약 300명의 승군이 흥국사에 상시 주둔하고 있었다. 여수 흥국사의 승려들이 이러한 호국정신을 계승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중간기착지인 오키섬에서 뇌헌은 안용복, 김사과와 함께 일행을 대표해 일본 관리의 문답에 응하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강원도에 속하는 땅임’(江原道此道中竹嶋松嶋有之)을 주장했다. 또 오키섬의 농가에서 일본정부에 제출할 소송문서를 작성할 때에도 뇌헌은 안용복과 이인성과 함께였다.

당시 일본의 ‘인번지’에 의하면 안용복은 ‘조울양도의 세금을 관리하는 장수’(朝鬱兩島 監稅將)라는 뜻의 깃발을 달고 있었으며 명시된 ‘조울양도’는 울릉도(일본명 죽도)와 우산도(독도, 일본명 송도)라는 것을 밝혔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산도에 대해서는 ‘우사무스무(ウサムスム)’라고 일본어 발음까지 병기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독도를 우산도라고 불렀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동시에 자산도(子山島)는 우산도(于山島)를 잘못 쓴 사실도 알 수 있다.

돗토리번(鳥取藩)에서 뇌헌은 그 자신을 '금오승장'이라고 칭하며 승군의 장수임을 밝혔다. 보다 적극적으로 직함을 밝힘으로써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영토수호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돗토리번(鳥取藩)에서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인번지’에도 뇌헌은 소송문서를 작성한 이인성보다 앞 순위에, 안용복 다음 두 번째로 직함이 기록됐다.

뇌헌의 역할은 일본 측 기록뿐만 아니라 조선 측 기록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뇌헌은 일본에서 그의 5촌 조카인 이인성이 소송문서를 작성하도록 권유한 것으로 기록됐다. 그만큼 뇌헌이 안용복과 함께 리더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임진왜란 후에도 300명의 승군이 계속 유지된 여수 흥국사승 뇌헌의 역할을 통해 당시 안용복 중심의 사사로운 움직임이 아닌 치밀하게 준비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며 “분명한 근거는 아직 없지만 당시 조선조정의 배후지원 또는 묵인아래 이뤄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동 발표내용은 금년 3월 『세계역사와 문화연구』 제54집(2020.3. 한국세계문화사학회)에 게재됐으며 최근 역사적으로 우산도(독도)는 ‘환상의 섬’이라든가 ‘상상의 바위섬’에 불과하다는 근거 없는 주장이 국내학계에 난무한 만큼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한 번 더 수정 및 발표될 예정이다.

[사진자료: 정태상 전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연구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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