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에서 상영되었던 ‘오징어게임’이라는 영화가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에 지난주 하루 날 잡아서 밤새 몰아보기로 감상을 했다. 감상 소감은 ‘열풍’으로 요약되는 세계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리 가슴 한쪽이 먹먹하였다. 어질 적 동무들과 해오던 게임에서 졌다고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인하는 장면이 대부분인 이 영화에 대한 평이 ‘광분’ 그 자체라는 사실에서다.

얼마 전 세계적 영화제에서 각종 상을 받은 ‘기생충’이라는 영화도 떠올랐다. 그 영화 역시 분노를 살인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물론 이들 영화엔 나름대로 이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장면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오징어게임에서는 선한 마음을 가진 주인공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차례 행운이 따라주어 사선을 무사히 넘는 장면이 나오면서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교훈이 없진 않았다. 기자의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서인지는 몰라도 아무리 그렇더라도 456억이라는 돈으로 인생역전이라는 목표를 위해 사람 목숨을 이렇게 벌레보다도 못하게 경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영화를 본 후 이런 생각을 어떤 모임에서 물었더니 그렇지 않았으면 영화가 흥행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즉답했다. 극단적 광기가 아니면 흥행(돈벌기)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또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을지라도 ‘이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영화에 광분하는 사회가 정상인가라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 속 오징어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대부분 과도한 빚을 짊어진 사람들이었다. 사회에서는 더 이상 버텨낼 가능성이 없어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국가와 사회가 이들을 재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토대를 만들지 않았고, 또 그런 토양이 없기에 이들은 죽음을 불사한 이 게임에 발을 들여놓았을 것임에도 이런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고 또 열광한다는데서 우리 사회가 너무나 병들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다.

물론 영화는 실제가 아닌 픽션(허구)이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죽는 것일 뿐 실제로는 죽지 않는 것인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 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영화가 세태를 반영하고, 후세들에게 적지 않은 문화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과연 영화 그 자체로 치부할 수 있을까. 어떤 이가 영화 한편의 영향으로 대한민국의 미래에너지인 원자력발전소를 가동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최근 국회의 국세청에 대한 국정감사를 앞두고 나온 자료 하나가 떠올랐다. 지금까지 우리 국민들이 헌법 제38조 ‘모든 국민은 납세의무를 진다’라는 규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금액(총 체납액)이 무려 100조원에 이르고 있다는 내용이다. 오징어게임 속 인물중에는 체납된 세금의 무게를 못이겨 참가한 사람들도 분명 많이 포함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다. 사업이 잘될 때 성실하게 세금을 낸 사람들이 사업이 어려워 세금을 체납할 경우 이전의 성실도에 따라 조금이라도 탕감해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미친다. 공무원들이 징계를 받을 때 훈장을 받은 사실이 있으면 징계를 탕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목숨을 담보한 오징어게임에 참가하는 용기를 새 삶을 꿈꾸는 결기로 바꾸지 않을까라는 순진한 생각도 든다. 갓 나은 아이의 이름도 짓지 못하고 오징어게임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영화 속 한 캐릭터에서는 눈물마저 쏟아졌다. 이런 극단적 장면이 넘치는 영화보다 권선징악을 노래하는 영화에 환호하는 그런 샹그릴라는 아직 먼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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