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형 시인
이돈형 시인

내 기일을 안다면 그날은 혼술을 하겠다

이승의 내가 술을 따르고 저승의 내가 술을 받으며 어려운 걸음 하였다 무릎을 맞대겠다

내 잔도 네 잔도 아닌 술잔을 놓고 힘들다 말하고 견디라 말하겠다

마주 앉게 된 오늘이 길일이라 너스레를 떨며 한 잔 더 드시라 권하고 두 얼굴이 불콰해지겠다

산 척도 죽은 척도 고단하니 산 내가 죽은 내가 되고 죽은 내가 산 내가 되는 일이나 해보자 하겠다

가까스로 만난 우리가 서로 모르는 게 많았다고 끌어안아보겠다

자정이 지났으니 온 김에 쉬었다 가라 이부자리를 봐두겠다

오늘은 첨잔이 순조로웠다 하겠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박정원 시인
박정원 시인

  우리는 애써 죽음에 대해 피력하길 꺼려합니다. 이 시에서처럼 죽은 나와 마주한 나는 결코 두렵거나 통탄해야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지요. 죽은 나와 둘이 마주 앉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들이켜는 술도 즐겁기만 합니다. 시적상황을 시인의 “기일”처럼 설정해보니 정말 할 말도 들을 말도 많아지는군요. 이토록 시인의 상상력은 시를 읽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짧은 행간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시의 힘이라고 보여줍니다. 마침내 동일선상에 머무는 이승과 저승, 그러함으로 죽음은 영원합니다. 언젠간 부닥칠 나의 기일과 이돈형 시인의 기일이 ‘길일(吉日)’이 되는 순간을 순한 평정심으로 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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