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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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석호영 세무사
석호영 세무사

유유히 흐르는 허드슨강과 아름답고 잔잔한 조지아 호수에 던져진 돌덩어리,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의 발견' 그것은 잔물결조차 없던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큰 파문을 낳은 '돌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운명적이고도 명백한 재앙의 예고였다. 아니 인디언족의 죽음과 멸망의 서막이었다.

그 후 300년 넘게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부딪치면서 그 신대륙, 아메리카에서 인디언들은 이곳저곳으로 내몰렸고 식민지 쟁탈을 위한 전쟁에 끊임없이 휩싸였다. 그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무참하게 희생되었다. 또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도 함께 진행되었다.

그때로부터 안락하고 평화롭기만 했던 아메리카는 그야말로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원주민들은 광활한 자연속에서 사냥을 해, 또 곡식을 가꿔 그날그날 먹고 살면 되었었다. 또 땅이 워낙 넓으니 원주민 부족간에 다투거나 전쟁이라는 것은 필요치도 않았다.

그들 원주민, 즉 인디언들은 배가 고프면 사냥을 해 먹고 사냥이 신통하지 않으면 감자나 옥수수로 배를 채우면 그만 이었다. 인구 밀도가 낮으니 서로 영역을 침범할 필요도 없었다. 욕심이나 질투도 거의 없었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마냥 편안하고 평화로운 생활이었다. '주먹 쥐고 일어서' '늑대와 함께 춤을' 등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소박하고 자연스러운가!

인디언의 삶과 일상을 상징이라도 하듯, 영화가 시작되면서 '1757'이라는 숫자와 함께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세 명의 사나이가 머리를 휘날리며 숲속을 질주한다. 이윽고 그들 앞에 나타난 사슴 한마리, 사냥을 나간 그들의 장총에 명중되어 쓰러진다. 순식간이었다.

그러나 신대륙, 아메리카에 도착한 백인들, 얼굴은 희고 눈은 파랗고 손엔 무엇인가 알수 없는 것을 들고 온 낮선 사람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목적은 탈취와 정착'임을 인디언들은 알게 되었다. 더욱이 원주민 부족과 동맹을 맺어 이주민들간에 서로 싸움질까지 했다. 때에 따라서는 인디언간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면서 그 속에서 그들의 죽음 또한 심각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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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가장 치열했던 전쟁!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 전쟁 중 대표적인 것이 영국과 프랑스가 7년간 싸운 ‘프렌치-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이었다. 북아메리카 오하이오 강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둘러싸고 일어난 식민지 쟁탈 전쟁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영국은 정복 후 정착이 목적인 반면, 프랑스는 인디언 부족과 교역 등 유화 정책으로 프랑스 쪽이 더 인디언 부족과의 동맹이 많았다. 또 인디언들은 그런 프랑스에 더 호의적이었다. 이들 인디언은 허드슨 강에서 미시시피 강 지역까지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영화 ‘라스트 모히칸’은 18세기 미(美) 대륙, 동부지역의 허드슨강과 조지아 호수 주변에서 벌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7년간 식민지 쟁탈 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인디언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국의 논리와 질서에 따라야 했던 인디언 모히칸족의 운명적 삶과 죽음,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인디언과 백인간의 애절하면서도 처절한 사랑을 덧칠한 영화였다.

600여 개의 인디언 부족 중 추장 칭카치국이 이끄는 모히칸(Mohican)족은 지금의 미국 뉴욕주 캐츠킬 산맥 북쪽 허드슨 강 상류 유역에 살았던 인디언들이었다. 또 맞붙어 싸우게 될 잔인무도했던 마두아가 이끈 휴런족도 바로 인접해 살고 있었다.

모히칸족 추장, 칭카치국에 의해 양육된 영국계 백인 이주민의 아들 나다니엘(대니얼 데이 루이스)은 인디언과 함께 원치 않는 영국 대 프랑스의 전쟁에 내몰려 각고의 모험을 겪게 된다. 그리고 영국군 장교의 딸 코라(매들린 스토)와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또 칭카치국의 아들 웅카스도 코라의 동생 앨리스와 사랑에 빠진다.

영화 '인도차이나'의 주인공 까미유가 죽음 직전의 그녀를 구해준 프랑스의 잘 생긴 장교 밥스에게 일순간에 사랑에 빠졌듯이 죽음 직전에 구해준 나다니엘과 웅카스에게 코라와 앨리스는 금새 사랑에 빠진다.

특히, 나다니엘과 코라의 사랑은 절박하고도 애잔하게 그렸다. 목숨이 사랑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다니엘이나 웅카스는 모두 잘 생기고 용맹스러웠다. 진정성있게 두 딸들을 지켜주고 애뜻하게 사랑했다. 전쟁 중에 이보다 더한 신랑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코라는 자기를 아버지가 있는 헨리 요새로 이끌고 가는 던컨 소령과 결혼 약속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다소 얼빵하고 우유부단한 그는 나다니엘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코라한테 나다니엘 눈 앞에서 가차없이 차인 것이었다. 역시 "남자는 잘생기고 용맹스러워야 미인을 쟁취할수 있다"는 말이 진리인 듯 싶었다.

영화는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 방점을 두기보다는 이 두 나라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이주민(민병대)의 처지와 피지배자인 인디언족, 모히칸족과 휴런족 등을 포함한 원주민들의 알력과 대립 상황에 더 방점을 두고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신대륙을 놓고 한창 식민지 전쟁을 벌이던 1757년, 영국의 지배를 받는 모히칸족의 마지막 추장 칭카치국과 그의 아들 웅카스, 그리고 백인 양아들인 나다니엘은 영국의 민병대 모집을 거부하고 겨울을 나기 위해 켄터키로 가기로 했다. 평소처럼 사냥을 떠난 것이었다.

한편 코라와 그의 여동생 엘리스는 영국군 사령관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던컨 소령의 지휘하에 헨리 요새로 가게 된다. 가던 중 길 안내자인 인디언 마구아의 배신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마침 인근 지역에서 사냥 중이던 칭카치국과 웅카스, 그리고 나다니엘 일행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마구아는 인디언, 휴런족으로 프랑스의 밀정 혹은 첩자였던 것이었다.

나다니엘은 천신만고 끝에 구한 두 자매를 아버지가 있는 헨리 요새로 데려다 준다. 요행히 나다니엘 일행은 헨리 요새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영국군이 곧 무너질 상태였다. 마치 고립무원이었던 조선 인조의 남한산성이 청나라의 용골대 군대에 무참하게 무너지듯 헨리 요새 또한 프랑스 군대의 대포 포화에 뻘건 화염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영국군은 이미 포기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영국군은 프랑스에 요새를 내주기로 하고 철수했다. 프랑스의 몽클람 장군은 요새를 떠나는 영국군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보냈다. 무기도 그대로 소지하게 하고 병사들도 포로로 잡아 놓지 않고 모두 보냈다.

패배한 적에게 정중하고 신사적인 태도가 인상적이었다. 귀족의 존재감과 자존심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 아닐까. 청나라가 인조에게 삼배 구고두레(三拜 九叩頭禮)를 강요한 것과는 딴판이었다. 아니 한편으로는 허세로 느껴졌다. 영국군은 언제 전쟁을 했었느냔 듯, 유유히 성을 빠져 나갔다.

그러나 복수에 사무친 마구아,

그는 영국군을 철천지 원수, "모두 살해하여 간이라도 빼먹어야 되겠다"는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인디언들의 서구 열강들에 대한 적개심을 영화는 그렇게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분통터졌겠나, 평화로운 땅을 전쟁의 포화에 휘몰아 넣었으니, 마구아의 심정에 공감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는 영국군이 돌아가는 길목에 그의 부족들을 매복시켜 놓는다. 마구아는 "영국군들은 다 죽여야 한다"며 철수하는 영국군과 나다니엘 일행을 협곡에서 일제히 습격했다. 골짜기의 양 사이드에서 기습을 당한 영국군, 독안에든 쥐 마냥 속수무책이었다. 퇴각하던 영국군은 화염에 덮여 보이지가 않았다.

급기야 코라의 아버지까지 살해됐다. 마구아는 그가 언급했듯이 그의 간을 빼어 뻘건 피를 흘리며 손아귀에 쥐고 흔들어 댔다. 얼마나 복수에 사무쳤으면 그랬을까. 그의 눈은 아직도 복수심에 불타고 있었다. 당시 인디언들의 이주민에 대한 적개심을 그를 통해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실제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결국 원주민과 영국군의 전쟁 양상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계책이었을까. 패한 영국군을 신사적으로 돌려보내긴 했지만 영국이 말려든 것 같았다. 또 마구아의 분노를 프랑스가 십분 활용한 듯했다. 프랑스가 영국군을 신사적으로 보내놓고 마구아를 통해 뒤통수를 친 것 같았다.전쟁상황에서 신사적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마구아에게 체포된 코라 자매는 휴런족의 족장에게 끌려가고 간신히 전투에서 살아남은 나다니엘 일행은 코라 자매 구출하기 위해 홀홀단신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든다. 휴런족 추장은 높은 대위에 위엄있게 앉아 "코라와 앨리스를 불에 태워 마두아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 주라"고 언명한다.

그러나 영국군 던컨 소령과 나다니엘은 "자신들을 죽이고 두 여인은 살려 달라"고 청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던컨 소령이 불타오르는 화형대에 매달리게 되고 이를 보고있던 나다니엘은 그의 고통을 덜어 주기위한 방편인지 불에 타고 있는 그를 총살한다.

영화는 광활한 대자연 속의 우거진 원시림과 아름다운 폭포, 호수, 절벽 위 등에서 긴박하면서도 사실적인 전투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절벽위에서의 결투 신(scene)은 백미였다. 마구아는 살아있는 코라와 앨리스를 대동하고 병사들과 함께 절벽으로 향했다.

이들을 뒤쫓는 세 사람, 칭카치국과 나다니엘, 그리고 그의 아들 웅카스, 긴박감을 한층 더 높여 주었다. 막내인 웅카스가 그들을 공격하고 두목 마두아와 맞서 싸우지만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두아는 웅카스를 단칼로 제압하여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렸다.

그를 사랑한 앨리스도 웅카스를 따라 스스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앨리스는 마치 한마리의 새처럼 치마자락을 펄럭이며 절벽 아래로 날아갔다. 적의 손에 놀아나기는 싫은 듯했다. 숙연하면서도 처참한 자살이었다.

이를 지켜본 칭카치국, 분노의 게이지가 극도로 올라간 것 같았다. 절벽위에서 칭카치국과 마두아가 사생결단의 싸움이 전개되었다. 잔인하고 싸움 잘하는 마두아도 칭카치국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마치 삼국지 장비의 장팔사모와 같은 칼로 마두아의 옆구리를 강타하여 절벽으로 그를 던져버렸다. 이렇게하여 싸움은 마무리되었다.

영화는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 사이에서 수난을 겪는 원주민과 이주민의 이야기였다. 유럽 제국주의에 때론 협조하고, 때론 저항하며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생존 방식이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이라는 고래 싸움에 인디언이라는 새우의 등만 박살 나는 전쟁같았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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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엔딩!

각고의 난관속에서 마두아가 이끄는 휴런족을 축출하고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주인공 나다니엘과 그의 여인 코라, 그리고 나란히 선 모히칸 족장 칭가치국이 하는 말은 약소 종족의 아픔을 잘 대변하는 듯했다.

“개척지는 해가 갈수록 인디언 숲을 밀어내며 넓어지고 있어. 언젠가는 모두 사라지겠지. 그때면 우리도 사라질 거야. 새로운 사람들이 오겠지. 일하고, 싸우고, 누군가는 우리가 한때 여기 살았단 것을 밝혀주겠지.”

결국 위 전투도 칭카치국의 모히칸족과 마두아의 휴런족의 싸움이 되었다. 영국이 부분적인 전투에서 패하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영국은 아메리카 대륙 동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후 미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 인디언은 수많은 박해와 죽음의 행진을 계속 해야만했다. 자기들의 모국이면서도 기나긴 세월 특정지역으로 부평초와 같이 떠돌고, 때로는 추위와 굶주림, 죽음을 동반한 수백 수천km 떨어진 곳으로 이주해야만 하는 눈물의 행진도 있었다.

현재는 마치 위리안치되어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이라는 곳에서 보호 아닌 보호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문명화된 힘이 없으면 결국 인디언처럼 객들에게 짓밟히게 됨을 느끼게 하는 영화 같았다.

비록 영화를 구성하기 위해 삽입해 놓은 장면같기는 하지만 모히칸족 리더중의 한사람인 나다니엘과 코라와의 러브스토리도 애절하였다. 특히 영화 전반부부터 엔딩까지 중요한 장면에 반복되는 메인 주제곡은 영화의 격을 올려 주었다. 그리고 인디언들의 한탄과 한숨, 태고적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이 배어, 긴 여운을 남기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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