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분쟁조정기준안 발표…판매사 배상비율 23~50%

판매사·투자자 책임 차등 반영해 배상비율 결정

고위험 상품 은행 판매규제 및 제도개선안 마련

팔려나간 계좌 40만개에 달하는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손실액이 6조원 가까이 불어난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판매사의 배상비율은 23~50%로 하는 분쟁조정기준안을 발표했다. 은행의 부실 판매 정도에 따라 최대 100%까지 배상하도록 했지만, 투자자, 은행, 금융당국 등 어느 쪽이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번 사태가 가져온 국민적 스트레스와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감독원은 지난 11일 홍콩 H지수 ELS 배상 기준안을 발표했다. 금감원은 금융사의 과실 여부, 개별 투자자의 특성을 하나하나 따져 차등적으로 배상 비율을 정하기로 했다.

금융사의 경우 적합성 원칙(고객에게 최적의 금융상품을 권유해야 하는 의무)을 지켰는지, 설명의무는 다했는지, 부당권유 금지 등 판매원칙에 따라 불완전판매를 위반하지는 않았는지 등을 따져 각사별로 기본배상비율 20∼40%를 적용하고, 내부통제 부실 여부에 따라 은행은 10% 포인트, 증권사는 5% 포인트를 가중한다.

투자자별로는 연령 등을 고려해 금융 취약계층인지, ELS 최초 가입자인지 여부에 따라 최대 45%p를 가산하고, ELS 투자 경험이나 금융 지식 수준에 따라 투자자책임에 따른 과실 사유를 배상비율에서 최대 45%p 차감한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지난 1월 8일부터 KB국민·신한·하나·NH농협·SC제일 등 5개 은행과 한국투자·미래에셋·삼성·KB·NH·신한 등 6개 증권사에 대해 두달 간 현장검사를 실시한 결과, 판매정책·고객보호 관리실태 부실과 판매시스템 차원은 물론 개별 판매과정에서의 불완전판매가 확인됐다며, 이를 배상안에 반영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분쟁조정안을 받아든 투자자나 은행쪽에서는 내심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분위기다.

투자자들은 "이번 피해는 은행들의 불완전판매가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며 "작년에만 수조원의 순이익을 챙겼던 은행들이 더 많은 배상을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이번 분쟁조정 기준은 억울하게 손실을 본 투자자가 합당한 보상을 받으면서도 투자자 자기책임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마련했다"면서 "앞으로 이에 따라 배상이 원활히 이뤄져서 법적 다툼의 장기화 등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최소화되도록 협조를 부탁드린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적 정서는 투자자와 판매사가 서로가 자신의 이익을 위한 투자와 판매 행위로, 여기에 외부 감시시스템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당국의 책임이 크다고 보고 있다.

우선 투자의 일차적 책임은 투자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모든 투자에서 이익이 나도 자신의 몫이고 손해가 나도 자신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투자에서 반드시 ‘원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내용을 확인해야 하고 자신이 직접 서명이나 날인을 해야만 한다. 손해를 본 투자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불완전판매였다거나 모두 판매자의 책임이 될 순 없다는 얘기다.

이번 사태에선 특히 은행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4년전 독일 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대량 손실 사태 후 이듬해 고난도 투자 상품 판매를 규제하는 금융소비자보호법을 두었지만, 수수료 수입에 열을 올린 은행들이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ELS를 19조원어치나 판매했다. 실태조사 결과 은행들이 직원 성과 평가에서 ELS 판매 실적 항목에 30~40% 이상 배점을 부여하면서 판매를 부추긴 한편, ELS가 손실 구간에 들어갔는데도 정상적인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평가하고, 내부규정까지 수정해 판매 한도를 늘리며 ELS 판매를 독려한 사실도 드러났다.

금융당국의 책임도 피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DLF 사태 이후 은행의 고위험 금융상품 판매를 금지하려다 은행들이 소비자 선택권을 강조하자 금감원이 ELS 판매를 계속 허용하면서 사후 감독·관리를 소홀히 해 피해가 커졌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세훈 금감원 수석부원장은 "과거 DLF 사태 때와 비교해서 상품의 특성이라든가 소비자보호 환경의 변화 등을 감안하면 DLF 때보다 판매사의 책임이 더 인정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 이렇게 보고 있다"면서 "다만 금융소비자보호법 이전 사례에 대해서는 판매사의 배상 책임이 조정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이번 배상안의 가산·차감 기준이 자의적인 측면이 있어 분쟁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지적과 함께, 이로 인해 판매사 별로도 희비가 갈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금융당국이 유도한 자율적 조정 계획에 따라 금융사가 이번 배상안을 기준으로 자율 배상에 나서면 판매와 투자자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을 경우 분쟁조정 절차를 밟아야 하기 때문에 조정 시점이 늘어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해진다.

한편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DLF 사태 이후 실시하려다 은행들의 반발에 미뤄졌던 홍콩H지수 ELS와 같은 고위험 상품을 은행이 판매하는 것을 규제하는 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김 위원장은 "전날 발표된 ELS 분쟁조정 기준안에 투자자 입장에서 불만이 있을 수 있고, 투자 안 하는 사람도 불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양자의 이익을 조화롭게 하려고 노력했다”면서 “2019년 DLF 사태 이후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제정됐음에도 불완전판매와 같은 문제가 나오는데 조사 후 원인에 맞는 제도개선 방안을 발표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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