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례 사는 후배가 택배를 보내왔다

이혜선 시인
이혜선 시인

  울안의 앵두 매실 머위대도 따지 못했어요 콩은 밭에서 콩깍지가 터졌고 고구마 두 이랑은 살얼음 낀 뒤에야 캐었답니다 감 몇 개 그대로 까치밥이 되고 밤은 쥐들의 먹이가, 대추와 산수유는 새들 먹이가 되었어요 그래서 제 집 남새밭에는 언제나 새들 지저귀는 소리 끊이지 않아요

  상자를 여니 서리 맞은 누런 호박 한 개와 대추가 들어 있었다 고구마 여나믄 개와 주황색 감이 남새밭과 감나무를 데리고 들어 있었다 바삐 통통거리는 그녀 발소리 속에 내년 봄 필 산수유꽃망울도 질세라 연노랑 하늘을 서둘러 열고 있었다

  빈 상자 속에서 또롱또롱 새소리가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뒤이어 지리산이 큰 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박정원의 시에서 시를 찾기]

시인 박정원
시인 박정원

  ‘천지에 봄은 오는데 꽃을 보면 눈물이 난다’던 애이불비(哀而不悲) 시인의 마음결이 이 시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지리산”의 너른 품이 “큰 걸음으로 걸어 나와” 지친 우리네 삶을 맑고 경쾌한 “새소리”로 토닥입니다. 척박한 도시 생활에 익숙해진 청각을 전원에서처럼 평화롭고 고즈넉하게 풀어줍니다. 2015년에 출간된 시집 『새소리 택배』 (문학아카데미)에서는 나의 '분별'로 인한, 부질없는 허상을 짚어낸 불이(不二), 즉 모든 사물은 하나의 상태일 뿐인데 자기중심적으로 선 긋기를 하며 급기야 옳고 그름, 선악의 판단까지 가하는, '내 마음이 짓는 헛것'을 시로써 명쾌하게 풀어냈습니다. 시인의 철학적인 고뇌가 지리산처럼 고요히 품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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